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자의 옥 (문단 편집) === 남산안(南山案)-대명세 사건(1711년) === 청 초기 산문계에서 이름 높았던 대명세(戴名世, 1653 ~ 1713)라는 사람이 명나라 시절 역사와 저집을 연구하고 참고하면서 자신의 저작 《남산집》(南山集)을 냈는데, 이 책에서 [[남명]] 최후의 황제인 소종 [[주유랑]]의 연호인 영력(永曆)을 썼음이 좌도어사 조신교(趙申喬)[* 조신교의 아버지가 대명세와 원한관계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.]의 상주에 의해 드러났다. 사실상 이 사건도 대명세가 자초한 사건으로 동양권에서 연호란 것은 단순한 [[기년법]]이 아니라 황제국의 조건 중 하나로 독자적인 연호를 쓰는 것을 꼽을 정도로 중요한 요소였고, 어느 세력의 연호를 사용함은 그 세력을 섬기고 따른다는 도식으로 받아들였다. 당장에 한반도 역사에서도 중국에 들어선 왕조들이 자기 연호를 쓰라고 독촉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. 연호 문제를 빌미로 삼았을 정도로 민감한 문제였다. 더군다나 이 경우는 명나라도 아니고 '''[[남명]]의 연호를 사용하였기에''' 더욱 문제시되었는데, 청나라는 남명을 공식 왕조로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. 청나라는 [[홍무제]]로부터 [[숭정제]]까지 명나라의 황제들을 선대 왕조의 군주라고 인정했지만, 남명의 황제들은 '''참칭자''' 정도로 간주했다. 남명은 《명사》에 기록은 되었지만, 남명의 황제들은 황제가 기록되는 <본기>가 아닌 보통 인물이 기록되는 <열전>에 실렸다. 즉, 청나라 입장에서는 명나라 연호를 쓴 것도 괘씸한데 정통성도 없는 황제의 연호를 쓴 것 자체가 문제였을 것이다. 더욱이 이 시점에서 남명은 망한 지 불과 50여 년밖에 안 지났고 명나라 부흥을 기치로 내건 동녕 왕국[* 동녕 왕국의 건국자인 정성공의 경우 남명의 제2대 황제를 옹립했고, 그 황제로부터 주씨 성을 하사받았다. 비록 정성공 사후 반청복명 기조는 크게 약화되었지만 명목상으로는 내걸어져 있었다.]이 망한 지도 30여 년밖에 안 지났기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. 따라서 '''남명의 연호를 사용했다 → 명나라 추종 세력이다 → 그럼 너는 반역 수괴'''라는 논리가 성립되었다.[* 대한민국으로 치면 서기 연호나 대한민국 연호가 아니라 주체연호를 쓴 것과 같다. [[박근혜 편지 사태]]가 논란이 된 이유 중 하나도 대한민국 연호나 서기 연호가 아니라 주체연호를 쓴 것도 있었다(참고로 이 당시 박근혜는 제1야당 대표였다). 그만큼 연호는 민감한 문제인 것.] 그나마 다른 문자의 옥과는 달리 생사여탈을 신중하게 사용했던[* 당시 인구가 억단위를 향해가던 청나라 '''전국'''에서 한해에 처형되는 사람 숫자가 '''두 자릿수'''였다. 위의 명사안 때는 사람이 많이 죽어나갔지만 이 땐 강희제가 어려 오보이 등이 섭정을 하던 시기라서 논외로 친다.] 강희제는 1713년에 대명세만 처형시키고 남은 가족들은 명령을 내려 영고탑(寧古塔)으로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지었다. 물론 대명세의 저서들은 모두 불태워졌다.[* 그나마 후손들이 어찌어찌 유작을 모아서 19세기에 출간한 저서가 현재까지 남아있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